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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1-23 13: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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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한 달 뒤, 제 나이 열 살 때 병환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하고 아버지를 부르며 붙잡고 몸부림치면서 울며, 불며, 애통해하다가 미친 듯이 두 작은집과 친척집을 돌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픈 소식을 전하러 뛰어다닌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여 평생 뇌리에서 잘 떠나지를 않습니다.


부안읍에서 변산반도 가는 쪽으로 해창이라는 곳에 우리 선산이 있었는데, 그 곳에 모신 조상님 묘를 막내 작은아버지 고집으로 딴 곳으로 이장하려고 봉분을 여는데 하얀 김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이 그 봉분 덮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했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 해 일 년 동안 집안 어른들 일곱 분이 세상을 떠나시는 큰 불행을 겪으면서 일 년 내내 울고만 살았습니다.


저는 절망적인 어린 시절의 쓰라린 눈물과 고통과 큰 상처로 인해 평생 정서 불안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후 혹독한 가난으로 부지런하고 착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누구나 죽을 수 있다’는것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제 생각의 범위가 너무 좁게 위축되고 생활화되어 대담한 꿈과 희망을 펼칠 길을 상실하게 되었고, 가족들의 보살핌 부족으로 일찍 학업을 포기하고 희망마저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고통은 착한 생각과 비례하는 것으로 착한 생각만으로 가득 찬 선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생활화되자 제 삶은 언제나 마음은 평온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의 큰 시련은 사랑하는 소중한 자식들과 생이별할 때, 그때 입은 큰 상처는 더욱더 큰 정서불안이 고조되어 눈물이란 말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인간에게 눈물을 없애 버렸다면 모두가 광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이따금 불면증으로 인해 처방을 받아야 밤에 잠을 푹 잘 수가 있으나 그 약은 하루종일 몽롱하게 합니다. 많게는 한 달여를 불면의 고통으로 늘 눈이 피곤하고 몸도 나른했지만 처음으로 2011년 말부터 지금까지 공부에만 전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시간에 관계없이 잠만 깨면 서재에서 독서하고 싶을 때 독서하고, 글을 쓰고 싶을 때 쓰고, 70세가 넘어서 영어공부를 해보니 제 자신이 행복했습니다.


몇 시 몇 분에 일어난다 생각만 하면 신체 시계(Body clock)가 정확하게 느끼고 일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단 일분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늘 머리가 깨어 있습니다.


자식들이 가난으로 굶주리고 학업을 중단할까 두려워 재산을 모두 주고 홀로 떨어져 살면서 고통의 긴긴 나날들을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몽의 세월들도 있었고, 밤잠을 못자고 빨랫골 깊은 산 속에서 몸부림치며 홀로 흘린 눈물의 양은 그만큼 선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나를 다스리고 가꾸는 시간으로 활용했기에 ‘참으로 멋있다’는 말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쓰라린 고통과 심한 슬픔이 더욱 빨리 잊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온 세월이 약입니다. ‘세월이 가면 모두 잊혀져!” 하는 위안 속에서 “세월은 약”이라는 망각의 법칙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 여러 공부를 하면서 망각(忘却)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며 사는 것이 인간들 모두에게 주어진 모순인 것 같습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씨앗을 맺고 새끼를 가지는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만, 인간은 자녀를 가지는 시기를 남자와 여자 모두가 모르고 사는 것이 그 동안 일류 전체의 오류며 가장 큰 모순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 저는 이 태전교육을 내놓았습니다.


진리는 살아온 삶의 고통과 비례합니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 싹 트기 시작한 정직하고 정의로운 진리만이 값진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사별의 고통을 많이 겪으며 또 이어지는 쓰라린 고통과 악몽은 더욱 값진 선과 함께 진실한 정신과 마음을 가꾸게 했으며, 참 정직을 터득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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