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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11 17: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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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보훈지청 보상과 김슬기

오는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92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맞아 매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기념식이 개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인 올해, 조국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과 투철한 애국정신이 더욱더 조명되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 의사는 김구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면서 시계를 교환한 뒤, 여유를 잃지 않고 홍커우 공원에 도착해 거사준비를 한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난 무렵, 의사는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뺀 뒤,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해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그 자리에 즉사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공사였던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됐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는 등, 만주사변의 원흉들을 한 곳에서 척살하는 성과를 이뤘다.


윤봉길 의사의 이러한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면서 무관심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침체됐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동년 5월 25일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 와중에도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말하면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고, 이후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일본에서 순국했다.


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을 바친 거사로, 대한민국 독립의 불씨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한 그의 회중시계는 멈추지 않고 쉼 없이 돌아갈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및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92주년을 맞아 윤봉길 의사의 애국 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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